제276호 2022년 6월 1일

건축학 교육에서 한국건축사의 가치는?

  • 입력 : 2021-09-01 19:30
  • 수정 : 2022-04-11 10:16

내년이면 우리나라가 건축학과 5년제 신입생을 모집한지 20년째가 된다. 일제식 4년제 건축교육의 틀을 벗고, 세계건축사연맹(UIA)의 기준에 맞는 국제 건축사자격의 획득에 적극 동참한 이래, 전국의 5년제 건축학교육은 20217월 기준, 68개의 인증프로그램이 운영 중이고, 하반기에 다섯 개 학교가 인증실사를 받을 예정이다. 4년제인 건축공학은 전국에 약 110개의 단위로 모집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5년제 건축교육에서 생긴 자연스러운 변화는 당연히 설계교육의 전문화이고, 건축사의 수준 높은 양성이 가능해졌다. 전환 이전 설계분야 취업비율은 통계적이지는 않지만, 필자가 느끼기에는 대략 10~20% 정도였다. 현재는 설계전공자가 약 40%로 늘어난 것이다. 많은 건축사가 배출됨으로써 질적 수준의 향상이 초래될 것이라 기대된다. 과다 경쟁의 단점 등에 대한 현실적 논의는 일단 유보하자.

그러면 학교 교육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당연히 대대적 개편이 있었다. 건축학인증원에서 추천하는 교육표준안에 맞추기 위해 모든 프로그램에 각고의 노력을 했고, 우리 학교도 인증을 받았다. 이를 위해 내적, 외적변화를 모색했는데, 아마도 많은 학교에서 훌륭한 설계교수를 초빙하는 일에 공을 들였을 것이다. 그것도 당연히 UIA 건축사자격증을 가진 건축사를 초빙하기 위함이다. 그 결과 대부분 50% 이상 설계수업으로 이루어진 교과과정 중심으로 개편되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대학들이 설계 담당교수 위주로 신임교원을 채용하다 보니 전공 구성원의 비율에 문제가 조금 생겼다. 교과과정은 설계와 이론을 병행하도록 하고 있지만, 많은 교원이 설계 전공자일 수밖에 없어, 결국 이론 전공자가 현격히 준 것이다. 아시다시피 건축이론은 건축역사이론과 현대건축이론으로 구분된다. 설계전공은 사실 현대건축이론과 유사한 부분이 많으므로 대부분의 교수는 현대건축이론 전공자들이다. 그러나 건축역사이론은 실무가 아닌 학문임으로, 박사학위과정을 이수하여야 하는 특수성이 있다.

현실적으로 부경의 대학에서 역사학자의 수를 보면, 예전에는 대학 당 1명 이상이었는데, 이젠 시도별로 거의 한 두 명에 지나지 않는다. 제일 큰 이유는 많았던 역사전공 교수들이 퇴직해 당장 절실한 설계전공 교수를 채용하기 때문이다. 역사전공은 시간강사로도 채용 가능하다.

이는 서울 소재 대학들도 비슷한데, 더 큰 문제는 대학원에서 발생했다. 전국 5년제 대학의 대학원 진학률이 준 것이다. 건축사자격에 실무가 중시됨으로 당연히 졸업 후 취업이 우선인 것이다. 더구나 역사전공 대학원생은 가뜩이나 교수도 적어진 차에 진학률도 낮으니 더 희소할 수밖에. 이젠 역사전공자의 명맥이 끊어지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그래도 우리나라 해외 유학생 비중이 많아져, 해외에서 역사를 전공한 학자들도 다소 늘고 있다. 학문도 국제화되었다.

건축역사 교과목은 학부에서 일반적으로 서양건축사와 한국건축사를 학습한다. 당연히 해외역사학자는 서양건축사를 더 연구했을 것이고, 교육수준도 매우 높아졌다. 필자가 배우던 당시에는 칼라 슬라이드 한 장 보지 못하고 교과서의 흑백 사진과 그림만 보았으니, 필자가 교직 20년 동안 20번 이상의 해외답사를 간 것은 모두 그 아쉬움을 물려주기 않기 위함이었다. 아무튼 유학파 교수님들 덕에 서양건축사 교육은 잘 되겠지만, 한국건축사 교육은 어떻게 될까? 앞으로 전공자가 나올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이렇게 된 원인인 근대화 과정을 잠시 살펴보자. 일본이 1868년 메이지 유신을 시작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시행한 것은 구미로 유학생을 보내는 일이었다. 10년 후 첫 유학세대가 귀국하여 대학교육을 시작했을 것이고, 30년 후인 1900년경의 일본 학계는 완전히 서구화된 시스템의 유학파 학자들과 그 제자들에 의해 주도되는 근대식 대학이었을 것이다. 이 때 동경대 건축과 조교수였던 세끼노 타다시가 1902년에 60여 일간 조사한 결과인 조선건축조사보고는 최초의 근대식 한국건축의 기록이다. 식민화 기초자료의 확보에 근대적 연구방법이 동원되었다. 철저한 서구식 개혁을 자의적으로 이루었던 것이다.

일본은 강점 직후 대대적으로 시행한 근대적 도시개선사업으로 대부분의 성벽을 철거했다. 혹시 일어날지 모를 민란의 거점을 무력화시킬 목적이었다. 서울 한성, 부산 동래성 등 조선의 107개 읍성들이 거의 철거되고 대부분 도로로 바뀌었는데, 이를 보던 당시 우리 선조들은 무슨 느낌이었을까?

이후 일본의 내선일체정책이 3.1운동의 큰 벽에 부딪히자, 그들은 서구문명의 전파를 통해 조선인을 회유하려 했다. 선심정책으로 청일전쟁을 위해 경부선을 가설하면 급하게 시공된 서울역을 1922~1925년에 새로 건축했다. 구 서울역사는 18세기 서구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절충주의 양식으로, 1910~1953년까지 사용된 구 부산역사 뿐 아니라, 구 한국은행 본점, 서울시청 등 많은 관공서들이 대부분 절충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마치 자기들이 배운 선진문화를 한반도에 전수해주려는 것처럼.

이렇게 새로운 문화를 강제로 접한 후 해방을 맞은 뒤, 우리는 미국의 모더니즘을 두 손 들어 환영했다. 조선시대에 명과 청의 사대논란으로 호란의 피해를 입은 선조들의 전철을 뼈저리게 알고 있는 우리 민족은 재빠르게 무게 중심을 바꾸었다, 일본에게 보란 듯이. 20세기 후반 한국건축은 완전히 모더니즘 시대였다. 우리는 일본이 그렇게 가르쳐 준 절충주의 건축을, 총독부청사를 철거하면서 혹은 서울시청사 위에 글래스 박스를 덮으면서, 완전히 기억에서 삭제했다.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에 가면 필자는 현지의 독특한 눈 맛에 매우 강한 향토성을 느낀다. 거기만의 맛이 있다. 반면 미국의 중소도시에서 여행할 때는 그런 맛이 덜했다, 아니 익숙했다. 고향에 온 듯한. 일제강점기를 통하여 한국건축의 맥락은 삭제되었는데, 정작 일본은 정교한 일본식 건축으로 발전시키고 있었고, 우리는 완전히 서구화되었다. 우리만 개조시키고 저들은 자신들 것을 버리지 않았다. 야스꾸니 신사로 대표되는 일본 신사는 전 열도에 남아있는데, 우리나라 마을 서낭당이나 초가집은 근대화 과정에서 대부분 철거되었다.

반면, 우리나라를 여행하면서 느끼는 풍토성은 매우 이국적이다. 국도변에는 아직도 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조성되었던 박공이 전면으로 보이는 경사 급한 서양식 지붕들이 더러 남아있다. 우리나라 집의 전통은 박공이 측면에 있다. 또 한 때 경남의 해변에는 공공경비를 지원해 페인트로 지붕을 빨갛게 칠했는데, 원인은 지중해식 풍경의 도입이었다. 전원주택을 지으면, 잿빛 기와는 걷어치우고, 대부분 그 붉은 색의 스페니쉬 기와를 쓴다, 알록달록 너무 예쁘게. 우리 유전자에 이제야 일제가 심은 서구정신이 살아나는 걸까? 해외여행의 봇물을 타고 서구화세계화로 이루어낸 결과가 독일마을, 미국마을을 조성한 것이다. 이제 한국인의 역사주의는 글로벌리즘, 근대 거장들이 그렇게 원했던 인터내셔널리즘인가.

다시 대학으로 돌아와, 완벽히 짜인 설계교육 프로그램은 창의성을 최우선으로 한다. 그러나 그 창의성에 한국적 역사의 맥락은 거의 없다. 필자는 대학에서 전통건축을 소재로 하나의 프로젝트라도 진행하는 것을 소박히 희망한다. 그러나 서구식 교육의 결과가 옳다면 우리나라 건축사도 프리츠커상을 받았어야 한다. 5년제 교육을 하지도 않는 일본은 7명이나 받았고, 드디어 중국도 받았는데, 우리나라는 왜 안 되는 걸까? 건축은 미래학문이라서 과거의 구태는 내던지고, 창의적인 양식으로만 설계해야 하는 것일까? 건축에도 한류가 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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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봉 교수ㅣ경상국립대학교 건축학과 



  • - 김화봉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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